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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thien
분류없음 l 2011/11/22 01:06


서유럽의 유대인 사회는 18세기의 근세화 조류를 맞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753년에 종전의 추방령을 철회하고 귀화령을 내렸으며, 177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을 채택한 미국이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역시 1791년의 프랑스 혁명이었다.
이런 일련의 근대화 혁명 열풍과 함께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해방운동도 서유럽 전역을 향해 급격히 확산되었다.
합리적-이성적-학술적 사고를 앞세운 선구적 사상가나 해방운동가들은 “만인” 의 범주에 유대인을 포함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혁명과 해방운동, 이성적 권위의 확산으로 인해 왕권신수설과 교회의 권위가 유명무실해 지면서, 그간 종교적 적대감에 근거해 당연시되던 유대인 차별은 일순간에 어리석고 무의미한 미신적 작태로 전락했다.
1789 년 프랑스 국민회의에서 클레르몽 토네르 (Clermont tonnerre) 후작은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아무 것도 허용되어선 안된다” 고 외쳤는데, 이 주장이야말로 혁명 당시 해방운동의 입장을 가장 명료하게 대변하고 있다.
프랑스에 이어 프로이센은 1812년, 덴마크는 1849년 유대인을 해방했으며, 프랑스에 비해 훨씬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는 1867년에 유대인 해방을 승인했다.
유대인들의 사회진출이 공식 허용됨에 따라, 유대인 사회는 급속히 활성화되거나 지역사회에 동화되곤 했다.
이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고, 의사, 변호사와 같은 주요 직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금융업 측면에서도 기존 유대인 상권의 규모와 노하우가 대거 양지로 기어나오며 양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19세기 초반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유대인 금융계는 로트실드 (Rothschild, 흔히 알려진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영어 발음이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권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이런 급격한 사회 진출은 유대인들이 기존의 유대교-유대사회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와 문명에 동화되는-이른바 세속화 과정으로 이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등을 돌렸고, 사교와 사회적 지위 변동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실제로 시오니즘 운동의 현실화를 주도한 테오도르 헤르츨은 어릴때부터 독일 장교가 되려 했으며, 유대교식 성인식을 치르지 않고 크리스마스에는 문 앞에 트리를 내거는 전형적인 “세속적 유대인” 이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사회적 스승인 랍비들 조차 이런 집 앞에서는 발길을 돌릴 지경이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유대인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했다.19세기에는 유럽 전체의 인구가 급증했던 만큼 유대인의 인구증가만을 특별히 보기는 어려우나, 유대인 사회의
대대적 추방령을 실시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65000명과 13만명에 불과했으나, 영토가 작은 네덜란드조차도 유대인 인구가 80000명까지 늘어났으며, 독일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각각 56만명과 1950만명의 유대인을 수용하며 서유럽 최대의 유대인 사회를 구성했다. (1890년 기준)

그러나 급격한 유대인 해방을 모두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대중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유대인이 해방운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사회 진출이 급증한 것은 유대인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상당한 악재로 작용했다.
대 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유대인의 사회진출을 “프랑크푸르트의 환전업자, 러시아의 고리대금업자, 폴란드의 여관주인과 갈리시아의 전당포주” 들이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기 위해 벌이는 술책으로 인식했으며, 유대인 해방조차도 "유대인 부자들에 의한 로비의 결과물" 로 받아들이려 했다.
당연히 유대인을 “정당한 사회 구성원이자 자신들의 경쟁자” 로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자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유대인들은 더이상 그들의 주거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만큼 더욱 심각한 불신, 잠재적 증오와 편견이라는 적대적 분위기에 갇혀 있었다. 이것은 이주나 봉기로 벗어날 수 있는 물리적 게토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다. 이런 적개심은 보통 잘 숨겨져 있지만, 영리한 유대인은 누구나 이런 위험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이런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적개심들은 종종 어이없을 정도로 미개한 형태로 돌출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피의 고발”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중세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의 아이들을 살해해 유월절의 희생제물로 사용한다” 는 속설이 19세기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
실 제로 레반트 지역의 다마스쿠스Damaskus 에서는 1840 년에 피의 고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현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혈 탄압을 시작했으며, 심지어 프랑스계 외교관들조차 이것을 “당연한 사실” 로 받아들이며 방조해 버렸다.
유 럽 출신의 비교적 이성적인 영국의 모세스 몬티피오레 Sir Moses Montefiore 와 프랑스의 법무장관인 아돌프 크레미외 Adolphe Cremieux 등은 이런 비이성적인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서둘러 상황 진압에 나섰지만, 이미 다수의 유대인들이 공격을 당해 사상자까지 발생한 뒤였다.
이런 사건은 유럽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1882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티소에슬라르에 사는 열다섯명의 유대인들이 소아살해혐의로 기소당했는데, 이들은 에슈터 소이모시라는 14세 소녀를 살해해 재물로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번에는 저명한 랍비였던 조제프 사무엘 블로흐 Joseph samuel bloch 가 가톨릭 신학 교수인 아우구스트 롤링과의 치열한 법정투쟁을 통해 피의 고발이 존재하지 않음을 법적으로 입증해 냈지만, 유사한 사례는 1893년까지 이어지며 블로흐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런 원시적 편견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서유럽에서는 1860년부터 “이스라엘 총연맹” 이 결성되어 홍보와 학술 활동을 펼쳤으나 “피의 고발” 같은 사례는 20세기까지도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사회가 도시화, 산업화, 과학화 되면서, 피의 고발과 같은 전근대적 미신에 기반한 비난은 과거와 같은 폭넓은 지지는 받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증오가 “유대인들이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의 고발은 이미 존재하는 증오를 합리화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종교적 편견이 설득력을 잃은 뒤에도 수그러들기는 커녕 새로운 근거에 편승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인종지상주의 이론은 19세기의 반 유대주의에게 퍽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이 최신 이론은 과학적이고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졌으며, 무엇보다 적용 대상인 유대인들이 단일 종교 이전에 단일 민족이었기에 적용이 매우 간편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급속도로 확산된 인종 지상주의에 기반한 편견들은 19세기 초-중반부터 시작된 민족(이기)주의와 맞물려 추악한 형태로 급성장했다.
특히 이런 반유대운동이 급격히 확산된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정당들은 많은 출판물들을 통하여 소위 ‘과학적인(scientific)’반셈족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론은 전체주의 국가로서 독일내의 반합리적, 반민주적 분위기를 깊게 반영하고있었다.
그러나 사이비 과학으로 분장했다 해서 돌연변이 민족주의의 본질은 바뀔 리 없었다.
모세스 헤스가 말했듯이 “독일인은 유대교가 아닌 유대인을, 유대인의 신앙보다는 유대인의 코를 싫어했다”

문제는 이런 진부하고 엉성한 증오가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독 일 제국 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의 유대인 해방을 승인하기는 했으나, 국내 사회 제어를 위해 반민족 감정을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이 시도는 잘 들어 맞아, 격변기의 사회적 불만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을 향하곤 했다. 실제로 반유대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대인 시민권 박탈 서명운동에는 수 주만에 22만명에 이르는 독일인들이 참여했다.

프랑스에서도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1894년 프랑스에서는 독일로 군사 정보를 유출한 스파이 “D” 를 수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대계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프 랑스군 당국도 D 가 드레퓌스의 이니셜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외에는 뚜렷한 단서를 지니지 않고 있었지만, 독일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후유증으로 인해 사건이 장기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사건을 최대한 빨리 무마하기 위해 정확한 수사과정을 은폐한 채 드레퓌스를 체포,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해 버렸다.
사실 이 단계까지만 하더라도 군사법정 역시 유대인을 범인으로 지목하려 했다기 보다는 범죄를 무마하기 위해 의심을 살 만한 희생양을 고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내의 반 유대 감정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군부와 가톨릭 교회, 언론 등은 드레퓌스의 예를 들어 공공연히 유대인의 사회 진출을 비난했다.
이 후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진범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을 추적해 냈으나,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당국의 무능이 부각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군은 외려 피카르 중령을 군사 기밀 누설죄로 체포해 버렸다. 덕분에 에스테라지는 혐의가 확인되었음에도 여전히 군적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898년 이 사건의 내역을 실은 서류가 신문에 공개되고, 작가 에밀 졸라나 아나톨 프랑스 등의 문화계 명사들이 드레퓌스 사건을 이성과 법치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렬히 비난하며 재심을 요구함에 따라 프랑스 전역이 친 드레퓌스와 반 드레퓌스로 나뉘여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군의 핵심이던 대령회나 기존의 반 유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가톨릭, 기타 보수 언론들은 친 드레퓌스 측의 주장이 프랑스 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범인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때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모독했다 하여 징역을 선고받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증과 범인이 명백한 이상 결론이 뒤바뀔 리 없었다.
1904년에 최초로 재심이 신청되었고, 2년 후인 1906년에 드레퓌스의 “복권” 이 선고되면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여기에서 복권은 무죄와는 다른 말이다. 프랑스군은 1995년이 되어서야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당시 군법회의가 조작되었음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드레퓌스 무죄가 선고된 뒤에도 대로에 모여 “유대인을 살해하라” 고 외치고 다녔다.
일부 인사들은 “스파이 혐의가 인정되지 않도록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몄을 것” 이라거나 “스파이 혐의는 있을지 몰라도 어쨌건 다른 죄는 저질렀을 것” 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드레퓌스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애초에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은 독일 육군의 장교로서 임관할수 없도록 규제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권에서 이런 사례가 이어지자 19세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대계 지식인들은 유대인 차별의 원인을 종교적 대립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대한 적대감에서 찾기 시작했다.
학술적인 분야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고심한 사람은 모세스 헤스Moses hess 이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반자였던 그는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성숙하기도 전인 1862년부터 “로마와 예루살렘” Rom und Jerusalem 이라는 저서를 통해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처음부터 민족 차원의 문제였음을 지적했다.
(헤스 자신은 이런 주장으로 인해 초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외면당해야 했다)
이 주장은 메시아의 도래만이 유대인 구원의 길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유대교식 사고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헤스의 주장 속에서 국가는 신이 유대인에게 제시한 약속이 아닌 “민족이 외부의 탄압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수단” 이었다. 그 곳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어느 곳이 되건 그것은 부차적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독립 주장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유대인들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세속화의 과정을 통해 모국 사회에 동화되기를 원하거나, 종교적인 약속-즉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들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양측 모두가 "민족 생존수단으로서의 독립" 이라는 주장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동화를 지향하는 유대인들은 헤스 등의 주장이 날로 격화되는 반유대주의 운동을 자극하리라고 보았다. 과거와 같은 "유대인 추방령" 이나 "추방운동" 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 제로 유대계 문필가 막시밀리안 하르덴 Maximilian hardern 은 자신의 글을 통해 초기 시온주의자들과 독일의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독일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시온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 고 외치곤 했다.
반대로 랍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적 경건성을 유지하려 했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해석을 고수하고 있었다.

서 유럽의 해방운동과 활발한 사회진출, 그리고 학술적 풍조는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라는 개념의 토대를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서유럽 유대인들의 세속화-지역동화는 외려 민족국가의 개념과 초기 시온주의가 현실적인 형태로 성장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결국 서유럽에서 태동한 초기 시온주의는 동유럽의 많은 인구와 절박한 상황에서 추진력을 빌려와야 했다.



서유럽의 해방운동과 권리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 유대인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과거와 같은 종교적 집단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은 1880년대를 기준으로 511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단일국가의 유대인 집단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중세까지 라인강변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아슈케나짐의 후예로, 이후 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의 공격으로 폴란드까지 밀려났다가 1772년부터 1795년에 걸친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러시아로 유입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해 전근대적 혐오감을 지니고 있던 러시아는 유대인 집단을 강제로 터키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흑해 연안으로 이주시켜 버렸다. 이 정책을 통해 흑해 인근에는 페일Pale 이라 불리는 대규모 유대인 격리사회가 결성되었다.
유럽과 달리 혁명 없이 구식 제정체제를 유지하던 동유럽-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중세를 연상케 하는 전통적인 유대교 중심의 폐쇄 사회를 구성했으며, 러시아 정부와 민중의 대 유대인 정책이나 편견 역시 과거와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각종 규제를 통해 유대인 사회에 제한을 가했다. (이런 현상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나 그와 동시대 작가 등의 소설에서도 종종 드러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생활하던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서유럽과 같은 해방운동이나 시민권 부여는 그야말로 별세계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동유럽권의 유대인들은 외려 12-13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적 경건과 신비주의 중심의 하시디즘을 18세기 중엽에 부활시키며 스스로 기존의 “닫힌” 유대인 사회 속으로 침잠했다.

결국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변화를 강요한 것은 해방운동에 의한 사회 진출이 아닌 종전보다 한층 가혹한 박해였다.
서유럽에서 유대인의 세속화가 가속되고 범 국가적 편견에 맞서기 위한 대안이 한창 논의되던 1881년에, 제정 러시아의 개혁성향 군주인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것이다.
황제암살은 인민주의자 집단인 나로드니키의 소행이었으며 그들 가운데 유대인은 단지 한명이 가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차르로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와 러시아 정부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암살 자체를 유대인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러시아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범인의 신상명세 보다는 “유대인” 이라는 공공의 분노대상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와 동시에 “임시법” 을 공포하여 페일 이외 지역의 유대인 주거를 완전히 금지하고, 이를 어긴 유대인들을 시민들이 직접 퇴거시키는 것까지 허용했다. 당연히 "직접" 에는 "물리적 수단의 동원" 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듬해인 1882년 5월에는 소위 “5월 법” 이라 불리는 유대인 박해법안이 발효되었다.
이 법안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케이크처럼 3등분되어 1/3은 학살당하고, 1/3은 국외추방되며 나머지 1/3만이 러시아 내에서 살아갈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정책을 통해 “유대인에게 분명한 혐의가 있으며, 러시아 정부가 유대인들을 정책적으로 제거하려 한다” 고 확신한 러시아 국민들에 의해 포그롬(Pogrom) 이라 불리는 대규모 유대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1881년부터 1884년까지 200여개의 페일이 공격을 받았으며, 러시아 정부는 정책적으로 포그롬을 추진/지원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를 방조했으며 관련자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1884 년 이후에도 적어도 20년동안 산발적인 대 유대인 공격이 진행되었고, 1903년에 1차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다시 시작되어 4년가량 이어졌다. 특히 1903년 4월에는 키시네프라는 도시에서만 2일간 유대인 45명이 죽고 600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1500가구가 약탈, 파괴당할 정도로 격렬한 탄압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다.

동유럽에서 진행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5월 법이나 포그롬처럼 정책적, 물리적으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있었던 시온 의정서(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정보 왜곡을 통해 반유대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 대인의 세계전복 계획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시온 의정서는 로트실드 가문을 포함한 주요 유대인 지도자들의 회견 내용을 빼돌렸다고 해서 잘 알려졌는데, 대부분의 반유대주의자들은 물론 히틀러조차도 이 의정서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러나 시온 의정서가 작성된 것은 1894~1897년, 공식으로 대외에 공개된 것은 1903년이었으며, 실제 작성자는 표트르 이바노비치 라츠코프스키라는 러시아 정보기관 출신의 첩보원이었다. 극렬 반유대주의자로 잘 알려진 라츠코프스키는 러시아 왕실 비밀경찰의 지원 하에 파리에서 위작한 문건을 대외에 공개했는데, 이는 1917년 혁명 이후 그의 보좌관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하지만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시온 의정서 자체는 반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홀로코스트의 소재가 되는 등 매우 긴 시간 동안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오 데사에서 동유럽권 유대인 계몽운동을 펼치고 있던 유대인 의사 레오 핀스케르는 1881년부터 시작된 박해에서 충격을 받아, 이듬해에 “자치 해방” Auto-emancipation 이라는 글을 통해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유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이룩해야 한다” 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핀스케르의 주장은 독일에서 시작된 헤스의 주장과 매우 유사했지만, 헤스의 주장 이상으로 호응을 끌지 못했다.
당장 페일에 격리된 유대인 사회에는 핀스케르처럼 고등 교육을 받고 세론에 민감한 고급 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현대적인 문화어로 기능하기 어려운 옛 유대어의 변형인 하시디어(히브리어가 아니다!) 를 사용하는 페일 내에서 독일어로 씌인 자치 해방이 널리 읽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와닿은 것은 외려 종교적인 운동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차르코프에서는 소수의 대학생들은 전통적인 종교관에 따라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자" 고 주장했다.
이 사야서 2장 5절의 내용을 따 BILU(Beth Iaakob Leku Unelkab,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러 걸어가자) 라고 자칭한 이들은 3000명의 유대인을 모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으로 주변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 이후로 1882~1904년까지 이어진 동유럽 유대인들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 시도는 일반적으로 1차 알리야Alijah 라고 불린다.
그러나 뚜렷한 자금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유대인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용두사미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882 년에 고작 16명이 러시아 땅을 떠났으며, 이후 50여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이들은 겨우 자파에 상륙했으나 개간지로 좁다란 땅을 구입하고 그것을 개간하는 와중에 2/3 이 불만을 품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런 상황은 비슷한 시기 발생한 히바트 시온 운동(시온사랑운동)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1882년부터 1890년가지 적어도 130개의 히바트 시온 단체들이 결성되었으나 대부분 BILU 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외려 훨씬 많은 미국인들이 북아메리카를 향해 떠났다. 적어도 250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전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배삯을 약속의 땅 대신 신천지를 향해 떠나는 데 지불했다. 이로 인해 미국 동부에는 대규모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유대인들은 7만여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팔레스타인의 가혹한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미국 등으로 재이민을 떠났다.
1882 년 당시 팔레스틴 거주 유태인 수는 2만 4천명 가량이었는데, 이들은 "이슈브" 라고 불리는 유대공동체를 이루며 예루살렘, 헤브론, 티베리아스, 사페드 등 네 도시에 오손 도손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유럽의 유대인들이 보내주는 "샬루카Chalukka" 라 불리는 기부금에 의지해 살고 있었기에 농경이든 공업이든 생존 기반이 될만한 요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트실드 가문이나 유명한 유대인 후원자 히르슈 남작 등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 정착을 후원하기 위해 농업학교나 병원 등을 설립해 주었지만, 이 역시 그리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결국 1차 알리야는 사실상 팔레스타인에 뚜렷한 정착기반을 남기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포그롬으로 인한 충격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동유럽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오데사를 중심으로 유대인 계몽운동인 Haskala 하스칼라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며 유대인 매체를 통한 옛 히브리어 부활이 현실화되었다.
특히 엘리제르 벤 예후다 등은 동유럽을 중심으로 남아 있던 변형된 이디시어를 대신할 수단으로 사멸한 옛 히브리어를 부활시켜 현대적인 언어로서 기능하게 했다.
계몽운동은 문화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시몬 두브노프 Simon Dubnow는 강력한 유대인 자치운동을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민족당 Folkspartey 이라는 유대인 정치단체를 창당하기까지 했다.
반 대로 동유럽 유대인들이 "사회적 약자" "노동자" 계층에 위치한다고 판단한 유대인들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의 사회주의 연맹은 1897년부터 정식 출범했는데, 이는 러시아 내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사회주의 정치단체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런 동유럽 사회의 강렬한 변화는 같은 시기에 서유럽에서 활동하던 헤르츨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본격적인 "정치적 시온주의" 의 아버지로 평가받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앞서 언급했듯이) 극작가 출신의 기자로, 생활이나 사고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세속화된 서유럽 유대인의 범주에 속했다.
그 는 1891년 10월부터 빈에 위치한 신자유신문의 특파원으로 파리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새로운 게토" 라는 글을 쓰며 유대인 독립에 대한 주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던 헤르츨은 헤스나 핀스케르 등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으나 (실제로 상당 기간동안 그들의 존재 자체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들과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유대인 생존을 위한 독자적 생존권-즉 국가의 형성을 구상한 것이다.
그리고 헤르츨은 1894년 12월 19일, 프랑스 전역을 휩쓴 드레퓌스 사건 관련 공판이 시작되자, 이 사건을 취재하며 반유대운동을 취재했으며, 이때 강렬한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논평을 통해 유대인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드레퓌스 사건에 영향을 받은 헤르츨은 BILU 의 주도자들처럼 막연히 자신의 생각을 좆는 대신, 명확한 스폰서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헤 르츨은 우선 1895년 5월에 유대인 후원가로 유명한 모리스 드 히르슈 남작을 찾아 자신의 유대인 독립국가 계획을 설명하려 했다. 히르슈 남작은 아르헨티나의 평지에 포그롬으로 박해받던 러시아의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르슈 남작은 헤르츨의 제안을 허황된 것으로 이해하고 간단히 거절해 버렸다.
이후 헤르츨은 대표적인 유대계 재력가인 로트실드 가문과 접촉하려 했으나, 로트실드측은 아예 헤르츨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1896년까지 그의 시도는 거의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다.
헤르츨은 일단 추가적인 스폰서 탐색을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가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1896년 헤르츨은 자신의 주장을 요약한 저서인 "유대인 국가"를 출판했는데, 유대인 지식층의 반응은 극히 냉담했다. 카를 크라우스 등의 유대인 문필가들은 헤르츨의 시온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일부 유대인들은 "헤르츨과 같은 이성적인 사람이 이런 감정적인 글을 쓸 리가 없다" 고 외면하기까지 했다.
랍비들도 "시온주의자는 성서에 나타난 메시아의 구원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라고 주장하며 맹공을 펼쳤다.
반대로 독일권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 국가" 의 출판을 크게 환영했으며, 일부 집단에서는 필독서로까지 애용되었다.
유대인 국가 자체는 유대인들 사이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지만, 지식층과 종교계의 냉담한 반응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여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헤르츨이 종전의 사상적 시온주의자와 분명히 구별되었던 점은, 그가 저술활동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행동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헤르츨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판적인 의견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영국으로 건너가 연설을 하거나 바덴 대공을 접견하고 독일 황제나 러시아 황제와의 접견을 시도했으며 같은 해에 이스탄불로 넘어가 투르크의 술탄까지 접견하고자 했다.
물 론 이런 일련의 접촉계획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으나 일련의 독특한 행보를 통해 헤르츨의 이름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접촉한 유대인들은 이후 헤르츨의 구상이 현실화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헤 르츨은 1897년 시온주의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관계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헤르츨은 처음에 취리히를 떠올렸으나, 러시아 측에서 대규모 비밀경찰을 주둔시키고 있는 취리히는 처음부터 동유럽 참가자들의 참가율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었다.
2차 후보로는 교통이 편리한 뮌헨이 선택되었으나, 이곳에서는 보수적인 "독일 유대교 성직자 총연맹" 이 시온주의 총회 개최를 극렬 반대했다.
결국 최종 후보지는 스위스 바젤의 어느 선술집으로 결정되다.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대외 이미지에 민감했던 헤르츨은 최종적으로 장소를 공립 카지노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유명 문화비평가이자 헤르츨의 친우인 막스 노르다우 등이 헤르츨의 조력자로 참가했다.
1897 년 8월 29일, 시온주의 총회가 정식으로 개최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알제리 등에서 온 200여명의 참석자들이 자리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러시아측이 63명의 대표를 파견했으며, 그들이 대부분 명망있는 유대인 사회 운동가나 랍비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연설과 토론을 거치며 조직을 재구성했다.
이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헤르츨이라는 초인 한명의 손에 진행되었다.
이때 일부 관계자들은 "당신의 계획에 동참할 유대인들은 아마 러시아계 뿐일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헤르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 유럽인들은 재력적으로 부유했으나 아직 반유대주의에 뚜렷한 위협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조직적이지도 못했다. 반면 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강렬한 탄압을 거치며 계몽 운동을 통해 대규모 인력의 동원이 가능한 잘 조직된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유럽 시온주의 운동의 가장 골치아픈 걸림돌이었던 "행동력" 은 강인한 동유럽의 아슈케나짐들에게는 별다른 장해가 되지 못했다.
1 회 시온주의 총회를 마친 헤르츨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바젤에서 유대 국가를 건설했다. 내가 만약 오늘 이렇게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5년이나 50년이 지난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50년과 6개월이 지난 후, 헤르츨의 장담은 현실이 되었다
Posted by Luthien
분류없음 l 2008/12/25 00:20

0. 그, 그다지 읽지 않아도 상관 없는 이야기.

 종교적 기록과 전승에 따르면, 유대인의 선조인“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에게 요르단강 서안과 지중해 동해안 사이에 자리한“카나안Canaan”지방에 대한 상속세 부담이 없는 영구적인 부동산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은 것은 BC 2100년 경의 일이다.
이 약속에 따라 유프라테스강 인근의 우르 지방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은 가솔들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른(다는) 카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후실 태생의 장자 이스마엘과 정실 태생의 차자 이삭으로 다시 나뉘었는데, 아랍인의 꾸란에 의하면 이스마엘은 메카로 이주해 아랍인의 선조가 되었고, 유대인의 성서에 의하면  이삭은 이후 유대인의 선조가 되었다.
복잡한 가계로 인해 신학적 분쟁의 소지가 발생한 신과 인간 사이의 부동산 권리증여는 이삭의 차남인 야곱의 대에서 갱신되었으며, 이때 야곱에게는 "이스라엘" 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이것은 그대로 그 후손들이 구성한 민족과 그들이 세울 국가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은 카나안 인근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약속된 땅을 떠나 이집트로 망명을 시도했는데,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의 규모는 단순한 지파 내지 유목 집단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인"들은 이집트 채류기간 동안 몇 세대를 거치며 간소하나마 민족이라고 불릴 만한 인구를 확보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지도자이자 선지자인 모세가 주도한 엑소더스를 통해 선대에 그 권리를 보장받았던 카나안 땅으로 귀환했고, 그곳을 점거한 타민족을 전쟁으로 제거한 후에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기원한 12개 지파이 강력한 종교 공동체를 이루는 형태의 국가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BC 1900 년 경에 세워진 최초의 "에레츠 이스라엘" 이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이 카나안 지방에 대한 국가로서의 실질적 영유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종교적 계약을 바탕으로 성립된 민족인 만큼,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때부터 강력한 신정(神政) 체제를 채택했으며, 카나안에 귀환한 이후에는 법과 도덕, 종교가 완전히 융합된 강력한 제정일치식 지파 연합체 국가를 형성했다.
 제사장을 위시한 종교지도자가 정치/사회적 지도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따금 전 이스라엘을 아우르는 사사나 선지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세습이나 선출과 같은 사회적 특성이 없는 종교적 영웅에 가까웠다.
 "뚜렷한 정부" 가 없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수시로 주변국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사실 국제법이 없는 시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에 자리한 젖과 꿀이 흐르는 유망한 부동산이 평화로이 소수 민족에게 독점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나 이집트 인, 아람인 등의 빈번한 공격에 노출되었으며, 상당 기간 동안은 종속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BC 1030년 경에 왕정 제도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1세대만에 왕가가 뒤바뀌고, 3대가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12지파 가운데 10개 지파가 연합해 기존 왕가를 무시하고 북방 이스라엘 왕조를 열어 버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다른 열 지파와 분리된 두 지파-유다와 벤자민은 별개로 남방에 "유대 왕국" 을 설립했는데, 이후 북방 이스라엘의 민족은 사마리아인으로, 남방 유대의 민족은 유대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유대 왕국의 후손에 해당한다.
북방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왕조를 이어나가다 BC 722년 경에 앗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패망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역사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분열된 유대 왕국 역시 순탄한 역사를 걷지는 못했다. 이집트, 앗시리아 등 다양한 국가들이 유대를 공격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종속을 택하거나 공물을 바치며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BC 597 년에는 그런 치욕스런 행운조차 따르지 않았다.
당대 최강국이었던 신 바빌로니아, 칼데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 침공당한 유대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당하고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압송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바빌로니아 군이 퇴각한 이후 유대 왕국은 이집트의 세력권에 들어가 바빌로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바빌로니아는 이에 BC 586년 재침공으로 응수했다.
이 공격에서 예루살렘 성은 물론 제정일치 사회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성전산의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고, 왕족과 주요 관리, 각종 재물은 물론 성전의 기물, 성물까지 모조리 약탈당해 수도 바빌론으로 넘어가 버렸다.
또한 BC 582 년에는 다시 병력을 동원해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집중되었던 유대 왕국의 엘리트와 많은 국민들을 바빌로니아 본토로 압송하고, 다수의 현지민도 정치적 결집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흩어버리는 강력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최초의 대규모 예리다(Yeridah, 유대인의 이주)와 그에 따른 디아스포라 Diaspora, 히브리어로는 Galut 라 불리는 유대인의 타국 유배와 현지 정착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때 모든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쫒겨나거나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압송된 포로는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바빌로니아가 몇 차례에 걸쳐 압송한 포로들에 대한 제한적 귀향을 승인함에 따라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런 귀향은 알리야Alyah 라고 한다) 그보다 많은 수가 자발적으로 바빌론 거주를 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리다와 디아스포라의 형성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종교적 약속을 상징하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함락, 영광이 약속되었던 유대 왕조의 멸절과 같은 종교-정치적 충격과, 유배사회에서 경험하게 된 강렬한 탄압은 유대교에게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약속된 땅-카나안이나 성전에서 바치는 희생 제물과 같은 종래의 종교의식에서 강제로 분리되자, 기존의 유대교적 종교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전과 제사장과 희생제물" 로 대표되는 기존의 종교적 연결을 대신하기 위해 지역 회당이 형성되고, 기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또한 유배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다니엘, 예제키엘 등의 선지자들이 출현해, 기존의 "선택받은 민족" 에 대한 가르침을 현세의 고난과 연결하기 위해 묵시론이나 구원론, 그리고 그에 대한 예언과 같은 양식을 도입했는데, 이런 특성들은 이때부터 후기 유대교의 주요한 형식들로서 유대교 내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런 종교적 변화는 국가와 성전이라는 사회적 종교적 구심점을 잃은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은 BC 538년에 유대인 제룹바벨이 간청한 대규모 귀향과 성전 재건을 승인했는데,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성전의 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소규모 귀향 사례와 구별된다.
하지만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희생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긴 했어도 여전히 유대는 페르시아의 속령이었다. 유대 왕조는 사실상 그 명맥이 다했으며 유대 지방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은 다윗의 후손이 아닌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다.
성전 재건으로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은 (제한적으로나마) 회복했어도, 주권만은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가 BC 331 년에 페르시아를 완전히 패퇴시킴에 따라, 유대 지방은 자연스레 헬레닉 문화권에 편입되었고, 유대인들도 헬레닉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페르시아 시절부터 해안에 살던 원주민들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유대인들을 강제로 잡아 헬레닉 세계에 노예로 판매하곤 했으나, 마케도니아 점령기 이후의 유대인 확산은 노예가 아닌 직업 차원에서 이뤄졌다.
실제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옛 이스라엘)인으로 구성된 지원군은 이집트와 바빌론 등지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용병으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헤카타이오스 위사-Pseudo-hekataios 등으로 확인된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헬레닉 문명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신교 문명권 답게 신앙의 강요와 신전 약탈을 승자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던 그리스인들의 행동은 무장저항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리스의 정책에 강경히 반발하는 유대인들을 진압하며 (이때 또 한번 예루살렘이 정복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거나 포로로 잡아가 현지에 정착시켰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유출된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시절부터 차츰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그들의 왕과 지휘관이 납득하는 범주 내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종교 의식을 치렀다.
이는 이미 바빌로니아 유수 당시 바빌론에 형성되었던 유대인 공동체와 유사한 것으로, 이런 민족 집단의 형성을 통해 유대인들은 국가를 잃고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지역/집단 내의 공동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한편 안티오쿠스 3세 등의 그리스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유대나 옛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다수의 유대교 성직자들을 각지로 강제 이주시키곤 했는데, 이런 유대교 성직자의 확산은 결과적으로 유배지 인근에 형성된 유대인 소집단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곤 했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헬레닉 세계의 디아스포라 유대교(Diasporajudentum) 는 노예, 용병을 시작으로, 유대 밖으로 자발적 의사에 따라 이주한 농부나 수공업자, 상인 등의 이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현지에서도 유대교의 고유 의식인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민족 종교이지만, 개종을 통해 유대신앙을 받아들일 경우 유대교로 인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BC 1세기 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전체 인구 가운데 40% 가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회당이 곳곳에 설립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리스 본국에서 정책을 내려보내면 유대에서는 대책을 세우는 사회적 대립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려 하자,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마카베오의 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BC 165년에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 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420년만에 세워진 이 유대인 독립국은 백여년이 지난 BC63년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고, 유대 지방은 다시 로마의 속령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첫 디아스포라 형성시 시작된 묵시론과 구원론은 점차 그 형태를 극화하여 유대인을 고난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영원한 영광의 신치국(이라 쓰고 이상사회라 읽는다)으로 완성할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형태로 변해 갔다.
 이런 종교관은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대 로마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에 로마에 대항해 민족적 무장항쟁을 시도했던 열심당 등의 강경파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산발적 저항을 거쳐 AD 66년에 유대 전역에 걸친 대 로마 항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는 6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투입해 유대지역 전역을 일소해 버렸으며, 유대 지방의 사회-종교적 구심점인 예루살렘과 중건된 성전조차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10군단 프레텐시스에게 점령당해 폐허로 변해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유대인 저항군은 마사다 요새로 들어가 항거를 계속했지만 이마저도 AD 72년에 10군단 지휘를 승계한 플라비우스 실바의 맹공에 무너졌고, 마사다 점령을 마지막으로 1차 유대-로마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는  중건된 성전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바빌로니아의 BC 586년 공격에 비견되곤 하지만, 성전은 파괴되었어도 여전히 유대지방의 저항의지는 남아 있었다.
AD 115년에도 2년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로마는 아예 유대 지역에 강력한 2개 군단을 주둔시켜버렸다.
 AD 130년대 초에는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전토에 할례 금지령을 내렸는데, 할례를 민족적 종교적 필수 의식으로 받아들이던 유태인들은 이 지시에 크게 반발했으며, AD 132년에 유대 지방에서 바르 코크바(벤 코제바, 바르 코제바, 도는 벤 코지바라 불린다)가 잔존 유대인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가장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선포하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135년에 브리타니아 총독 율리우스 세베루스 장군에게 5군단 마케도니아와 11군단 클라우디아 등을 위임해 유대 지방을 정벌하도록 했다.
 3차 유대-로마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엉성하게나마 재건되려던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파괴당하고 그 과정에서 50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해당하거나 공개 처형 되었으며,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던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 역시 로마군에게 살해당했다.
 로마는 이를 계기로 유대인의 성전 재건이 완전히 불가능하도록 예루살렘 시가지에는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시가지를 구성하고, 유대인들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출입은 1년 중 단 하루, 즉 성전파괴일 (아브월 9일) 에만 허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여력이 되는 유대인들은 아브월 9일마다 유일하게 남은 옛 예루살렘의 흔적인 서쪽 성벽에 모여 통곡하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이후 로마는 유대(Judaea) 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옛 이름인 팔레스타인을 부활시켰다. 유대라는 이름이 2000년 만에 지도 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소실, 두 차례 반란의 처참한 패배는 유대교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켰다.
파괴된 성전을 대신해 바빌로니아 디아스포라와 같은 "기도" 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이를 위해 공식적인 기도문들과 시간과 상황에 맞는 기도의 형식과 같은 현대 유대교의 기본 형식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였던 야브네의 가말리엘은 이전까지 내려오던 기도문을 정리해 공식화 했는데, 그가 정리한 기도문 가운데 하루 세 번 기도하도록 명시된 Shemoneh Esreh (18구 기도문)은 메시아의 도래와 이스라엘로의 귀환, 예루살렘의 회복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신앙에 "귀향 Alyah" 의 소망이 직접적인 형식으로 포함된 첫 사례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시대와 달리, 이 당시에는 유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로마 세계 각국에 퍼져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현지 태생이었으며, 지역별로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하며 유대인의 종교와 생활 양식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안정된 생활권을 확보한 현지의 생활을 버리고  잦은 반란으로 인해 피폐화된 유대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당장 바빌론 점령 이후 하스몬 왕조 일백여년과 짧은 반란기를 제외하면 어느 순간도 독립국가로 남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독립국가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잡는것 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또한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메시아가 대지에 서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랍비들은 팔레스타인-옛 이스라엘을 인간의 힘으로 되찾아야 할 곳이 아닌  "메시아 이후 돌아갈 약속의 땅" 으로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유대교의 성격을 점차적으로 멜랑콜릭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게다가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311년과 313년에 걸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 두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381년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채택됨에 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가운데 성자이자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유대인들을 좋게 보아 넘기기 어려웠다.
실제로 성인 아우구스티노는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유대인의 전통과 인습은 기독교인에게 있어 치명적 해악이다. 누구든 저들을 따르는 자는 사탄의 무저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몇닢의 은전에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야말로 유대인의 상징이다. 유대인은 결코 성서를 이해할 수 없으며 영원토록 예수를 죽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들 역시 쉐모네 에스레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문구를 삽입한 만큼, 이래 저래 기독교와 절친한 관계를 향유하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실효적 지배자가 된 동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성지” 로서 예루살렘을 복원하며 335년에 성묘교회 등의 각종 성지교회를 짓고 예루살램을 중건함에 따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 접근할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유대인-특히 일부 종교 관계자들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계속했으나,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하게 된 동로마 제국은 끝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유대인의 예루살렘 진입이 가능해진 것은 638년,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였다.
사실상 이슬람과 정면 대결 상태였던 비잔틴의 기독교는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대체로 이슬람은 자신들의 세력 내에서 원칙적인 종교의 자유 정도는 보장했으며, 유대인들도 박해를 받기는 했어도 불안하나마 그 관용(?)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다.

한편 유럽이 실질적인 중세에 접어든 이 시기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 그리고 생활의 편리나 기타 이런 저런 이유로 집단 거주지를 선호했으며,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국가들이 법적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와 그 면적 등을 제한해 버렸다.
이후 이런 공간에는 페일이나 게토와 같은 이름이 붙었으나, 이런 유대인 집단거주지 자체는 이미 로마시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기독교권 국가에서는 일반인과 교회의 박해로 유대인이 마을이나 도시 중심에서 거주할 수가 없었으므로 사소한 박해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거주지 외곽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리 하에 종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의 특성 상 집단화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유대인 거주지들은 이슬람이 스페인을 지배한 10~12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에서 확산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 당시에는 라인강 연안을 따라 확산되기도 했다.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세파르딤, 라인강 인근을 따라 정착한 유대인은 아슈케나짐이라 불렸는데, 각각 스페인 독립 후와 1095년 제 1차 십자군 당시 해당 지역에서 밀려나 세파르딤은 서유럽 전역으로, 아슈케나짐은 폴란드와 러시아 등 동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어 그곳에 집단 거주지를 조성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했다.
거주지는 물론 직업의 선택에서조차 제한을 받던 유대인들은 자연스레 기독교 문화권에서 천시받던 고리대금업, 전당포업, 숙박업 등의 "외면받는 직업" 을 선택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지역 주민과 사회의 분노를 사곤 했다.
이런 유대인에 대한 분노는 구교와 신교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마틴 루터의 기록은 당시 유대인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뚜렷이 보여준다.

(상략)..."어쩌면 부드럽고 온화한 기독교인들은 불쌍하고 핍박받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내가 너무 심하게 이들을 조롱하고 비아냥댄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말을 들으라, 유대인과 같은 악마적인 족속을 조롱하기에 나는 너무 미약하고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저들이야 말로 온갖 냉소와 조롱의 천재들이며 이 분야의 대가인 신을 섬기고 있다. 그 신이란 바로 사탄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구약성경만 보더라도 유대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온갖 타락상과 악의에 찌든 불량배들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며 그 누구도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대금업, 간첩, 배신과 기만행위로 나라를 망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애들을 훔쳐가고, 한 마디로 온 세상에 퍼져 인간에게 해가되는 갖은 못된 짓은 다 하는 족속인 것이다."

이런 종교적 증오나 선입견 등은 기독교권 전체와 이슬람권까지 퍼져 있었다.
전염병이나 화재와 같은 재해가 군중심리에 불을 붙일 경우, 유대인 집단거주 지역은 애써 목표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간편한 "과녁" 이 되곤 했다. 실제로 1066년에는 아랍인이 그라나다에서 4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1290년에는 영국인이 영국 전토에서 16만 5000명의 유대인을 추방해버렸다. 1298년에는 10만명의 유대인이 프랑코니아 바바라니아에서 살해되었고, 1306년에는 프랑스에서도 10만명이 추방되었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1348년에는 단 일년만에 "유대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는 소문이 퍼지며 적어도 백만명이 학살되었고, 1492년에는 스페인이 종교재판을 구실로 30만명을 추방하고 추방을 거부한 인원은 전원 사형시켰다. 1560년에는 체코에서 유대인 거주지역에 대한 집단방화가 일어나 3000가구가 소실되었으며 1648년부터 시작된 폴란드와 러시아의 전쟁에서는 십년동안 40만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런 경향은 흑사병과 같은 전 유럽적인 상황이 아닌 한 대체로 국지적이었으며, 유태인들의 지역사회도 빈번하게 파괴되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복구되곤 했다.
하지만 이런 강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하루 세번 쉐모네 에스레를 외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논지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인구 수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성지를 방문했던 유태인 순례자 투델라의 벤자민(Benjamin of Tudela) 은 팔레스타인의 유태인수를 1170~1171년경까지 1440 명이라고 기록했고, 나흐만 게론디(Nahman Gerondi) 는 1267년 예루살렘에서 유태인을 단 두 가정만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유태인 수는 19세기 초까지도 8000명에 불과해, 무려 시리아에 거주하는 유태인 25000명 보다도 명백히 적었다.
12세기에 예후다 할레비Jehuda Halevi 등의 시인이 염세적이며 애절한 운율로 시온의 영광을 노래하거나 1700년대에 랍비 예후다 헤하시드Jehuda He-chassid 의 지도로 소규모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떠나기도 했지만, 이런 소수의 사례를 전 유럽은 물론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는 유대인들 전체의 의지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실제로 박해받는 입장에서 대규모 종교적 운동 (특히 기독교의 성지를 탈환하려는) 을 벌일 수도 없었다는 정치적 한계도 존재했고, 랍비들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귀환은 메시아 이후" 라는 가르침을 고수하여 종교적인 명분도 희박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 현지까지 긴 여행을 버텨낼만한 여유도, 팔레스타인 도착 이후 생계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이런 저런 요인들은 벌써 천 년 이상 유대인의 발목을 잡고 있었으며, 누구 하나 그 족쇄를 풀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에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18세기 초에는 덴마크에서 태어난 유태인 출신 상인인 올리거 파울리 Oliger Paulli 는 흑해와 홍해 사이에 유대왕국을 세워 전 유럽의 유대인을 그곳에 이주시키자는 제안을 했으며, 이 주장은 무려 기독교권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1세기 후에는 나폴레옹이 민법전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일반인과 대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1799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소유권이 유대인에게 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1825년에는 미국 독립 50주년 기념(-_-)으로 유대계 미국인 모르데카이 마누엘 노아 Mordecai Manuel Noah 가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위치한 그랜드아일랜드라는 섬을 점유해 아라라트Ararat 라는 유대인 자유도시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무려 잃어버린 10지파(사마리아를 뜻한다) 까지 포함한 노아의 원데한 계획은 노아가 아라라트에 도시를 세운다는 언어유희적 센스는 훌륭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고, 끝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시 파리 최고 유대교 성직자 회의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돌아갈 때를 알고 계시다" 며, 이런 일련의 시도에 대해 단호히 일침을 놓기도 했다.
확실히 유태인이 이스라엘을 잃은 것은 그 죄과 때문이며. 실향은 구세주의 도래로만 치유될 수가 있는 만큼, 인간의 힘에 의지한 귀향이나 독립국의 설립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 상당수 랍비들의 의지였다.
심지어 미국의 유태인 종교지도자 모임인 미국 랍비 중앙 협의회는 1885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피츠버그 강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근 1900여년 전에 잃어버린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또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Posted by Luthien
분류없음 l 2008/12/2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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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thien
분류없음 l 2008/11/20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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